시몇편 103

보약

보약 한승필 보약을 모르고 살아왔지만 좀 더 오래 살고 싶은 바램으로 누가 몸에 좋다는 보약 얘기를 하면 눈이 번쩍 두 귀가 솔깃해진다 약효를 알려면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아봐야 알겠지만 결론은 오래오래 장수하겠다는 말인데 갈대처럼 흔들리는 간사한 마음은 짧고 굵은 것보다 바지랑대만큼 긴 것이 좋아 실처럼 기다랗게 살다 가고 싶은 거다 땅을 밟은 두 다리 짱짱하다면 이번 가을 가기 전 보약 한재 달여 먹어야겠다

시몇편 2020.11.15

낙엽에 대하여

낙엽에 대하여 한승필 우리는 나뭇잎 하나가 떨어져 생을 마감하는 과정을 비망록에 쓰지 않는다 다들 그렇게 가을을 떠나고 있다 슬프거나 외롭다는 생각이 넘쳐나는 순간에는 낡은 책장을 넘기듯 지난 이야기 뒤적이지 말자 생은 한 권의 책으로 묶일 수 있는 로망이 아니기에 사랑아 우리도 이 계절엔 길을 떠나더라도 깊은 계곡에서 길을 헤매는 허무한 고독에는 빠지지 말자 호젓한 길목에선 만남과 이별의 모든 망상을 가슴, 가슴으로 덮어두는 것이다

시몇편 2020.11.03

홍삼 한 뿌리

홍삼 한 뿌리 한 아무개 한 시절 가고 느자구 없는 소리지만 임자, 달도 차면 기운다 안하요?! 이빨 빠진 누렁이가 그랍디다 밤으로 죽어 가는 이녁 나 살려라, 소뿔 아니 개뿔을 잡아본들 헛물 켜는 소리라제 딱 부러진 한 마디 걸중이 그라는디 홍삼 한 뿌리만 과먹으면 살아난다 그랍디다 회춘할 것 같다고 임자 살려 줄라믄 홍삼 한 뿌리만 묵어야 씅께 자네도 좋고 나도 좋은 홍삼 한 뿌리만 푹 고아 주면 풋고추 파딱 서듯 임자 좋고 나 좋고 정분도 나것제 잉 구들장 꺼지는 건 알아서 허드라고

시몇편 2020.08.22

충무 앞바다

충무 앞바다 한승필 겨울 바다에는 죽어서도 가지 말자 청춘이 파랗게 멍든 바다 누구에게 저리도 두들겨 맞았을까 뜯을 것 없는 내 아침 밥상 국물도 없는 바다 고깃배도 뜨지 않는 포구에서 해풍은 마른미역을 걷어내듯 갈고리로 세월을 낚아 올린다 그래도 찾아가는 겨울 바다 선창에 서면 갈치 떼에게 뜯기는 오장 바다는 내 육질에 입맛을 잃었는가, 더는 볼 일 없어 돌아서는 겨울 바다 됫소주 한 병 나팔 분 뒤 오장 까뒤집어 게워내고 갈거나 더는 인연의 닻줄 내리지 말자 충무 앞바다에 돌아서는 발길이 또 무겁구나

시몇편 2020.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