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 물고기 한승필 물고기를 잡으려고 방죽에다 매일매일 그물을 치는 어부 물고기는 이리저리 수초를 따라 몸을 숨긴다 덩달아 수문을 열어 물을 빼는 관리인 이번엔 아예 씨를 말릴 작정인가 신선한 산소를 넣어 주겠다던 수족관 아저씨도 따라서 '너 죽어봐라' 설쳐대고 물 위로 건져진 물고기는 그제서야 마취에서 깨어난 듯 펄떡, 도마 위에서 몸을 한번 뒤척여 본다 한 접시의 횟고기로 탁자 위에 올려진 아름다운 종말이여 시몇편 2020.02.10
파로호 파로호 한승필 破虜湖는 오랑캐를 수장했지만 나는 파로호에 어린 꿈을 수장했다 너무 쉽게 부서진 슬픔의 잔해들이 햇빛을 받은 물결 위에 눈부시다. 저 깊은 속을 물질하듯 들여다보면 너는 더 깊이 잠수하고 사실 드러내 보일 것 없는 파로호의 추억은 너무도 시시해서 뒤로 기운 역.. 시몇편 2020.01.31
*모래 위에 쓴 편지 편지 한승필 누군가 소중한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싶을 때는 한적한 바닷가 마을을 찾아 모래 위에 꾹꾹 눌러 써보라 세월이 흘러 밀물과 썰물은 너의 흔적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다시 지우겠지만 가슴을 적시고 간 어둠의 공간에서 밀어의 조각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깊고 넓은 가슴이 품게 해두라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 다시 가슴이 시려오는 날 누군가 이 바다에 다시 찾아와 그리움에 사무친 편지를 쓰게 되면 가슴 아린 밀어의 조각들을 다시 꺼내 읽으리니 너와 나는 언제나 빗금처럼 바닷가를 서성이다 가리라 시몇편 2020.01.23
도토리묵 도토리묵 한승필 겨울밤에는 메밀묵도 좋지만 입안에 선뜩 온몸으로 다가오는 도토리묵 무침이나 도토리 묵밥이 그만이다 먹어는 보았는가 도토리 묵의 진수를 말린 도토리묵 무침도 그만이지만 아무래도 도토리묵의 제맛은 슴슴한 도토리 묵사발이다 시몇편 2020.01.06
*포구에 서서 포구에 서서 한승필 포구에 서서 포구를 그리는 것은 남태평양 타히티의 폴 고갱 같은 사내가 파도에 멍든 길들어진 고독을 털어내는 일 섬과 포구를 거느린 바다는 남풍을 끌어와 시린 가슴에 안겨주지만 포구에 서서 또 다른 포구를 그리는 것은 파고드는 목마름에 가슴이 타는 낯선 이국에서 한 사내가 눈시울을 적시는 것 같은 배 한 척 없는 포구에서 너의 나침반은 방향키를 바꾸라고 꾸역꾸역 물안개를 피워낸다 *그림: 프랑스의 르느와르 작 시몇편 2020.01.03